전쟁 영웅이자 아이돌 스타였지만 그로인해 탄탄대로의 연기 경력이 훼손된 웨인 모리스(Wayne Morris)
이미 20대 초반부터 헐리웃의 향후 20년간을 보장할 배우라는 ‘아이돌’ #Idolstar 스타로서 가치가 있었던 그는 일찍 출세가도를 달린 배우로서의 경력이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해군조종사로 파견되어 일본군 항공기 7대와 5척의 전함을 침몰시키면서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전쟁영웅으로 미화되어 이전의 아이돌 스타로서 쌓아놓은 3~4년간의 대단한 경력들이 무의미해지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버트 디웨인 모리스(Bert DeWayne Morris)라는 이름으로 캘리포니아주 파사데나에서 태어난 그는 LA시티칼리지대학의 미식풋볼팀에서 풀백을 보다가 잠시 산림경비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좀더 나은 삶을 좇기위해 파사데나 플레이하우스에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바로 그무렵 플레이하우스를 찾은 워너사의 스카우터에게 발견된 그는 1936년 워너브러더스와 정식 계약을 체결하였다. 흔치않는 금발의 앳티나는 소년같은 이미지는 마치 완벽한 옆집 소년의 타입이었고 그해 #팻오브라이언 #Patobrien , #험프리보거트 #Humphreybogart , 그리고 #로스알렉산더 #Rossalexander 등 거물 배우들이 출연한 멜로 드라마, <차이나 클리퍼, China Clipper>의 조종사역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핸섬한 마스크와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활용한 <하키의 왕, King of Hockey, 1936년>, 마이클 커티스가 연출한 스포츠 드라마, <키드 갈라드, Kid Galahad, 1937년>, 그의 전매 특허인 복싱 영화 <키드 돌아오다, The Kid Comes Back, 1938년>, 그리고 버스비 버클리의 흔치않는 멜로드라마, <남자들은 정말 바보야, Men are Such Fools, 1938년>에서는 #프리실라레인 #Priscillalane 과 또다시 파트너로 등장하였고 윌리엄 키글리의 모험극, <거인의 계곡, Valley of the Giants, 1938년>, 그리고 범죄드라마, <이중 알리바이, Double Alibi, 1940년>등에서 확고한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바로 그무렵 그의 연기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결코 뗄래야 뗄수가 없는 불운이 겹쳤다. 영화 <플라이트 엔젤스, Flight Angels, 1940년>를 촬영하는 동안 갖게된 비행사의 꿈을 현실화하면서 영화가 끝난 후 조종사가 되려는 집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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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드라마, <나는 날개를 원한다, I Wanted Wings, 1941년>에 이어 서부극, <미주리에서 온 악당, Bad Men of Missouri, 1941년>을 끝내고 해군예비역에 입대하여 이듬해 해군비행 조종사가 되어 각종 전과와 승전보를 들려주면서 전후 제대하여 다수의 전쟁공로 메달을 받아 전쟁 영웅이 되었다. 전후 다시 자신의 직업인 배우로 헐리웃에 돌아왔지만 4년이라는 긴 공백은 소년같은 이미지가 사라졌고 대신 품위를 그의 모습에 덧입혀 놓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전쟁에 참여하느라 잃어버린 4년간의 시간을 회복하기위해 <깊은 계곡, Deep Valley, 1947년>, <너의 인생의 한 때, The Time of Your Life, 1948년>, <어둠 속의 키스, A Kiss in the Dark, 1949년>같은 쟝르에 국한하지 않는 작품에 주연은 물론 보조 조역으로 출연했지만 영화의 질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전쟁 영웅으로 돌아오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성공을 위한 지렛대가 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의 확신은 <자니 원 아이, Johnny One - Eye, 1950년>, <시에라 패세이지, Sierra Passage, 1950년>, <매복, The Bushwhackers, 1952년>, 그리고 <라이딩 샷건, Riding Shotgun, 1954년>같은 싸구려 저예산 서부극에만 머물렀다. 그럼애도 그는 50년대 내내, 영화와 TV에서 자신의 역할인 대중들을 위한 연기를 이어갔으며 1957년 #스탠리큐브릭 #Stanleykubrick 이 연출한 <영광의 길, Paths of Glory>에서 약자로서의 그의 멋진 연기는 그가 좀 더 살았다면 훨씬 나은 배우로서의 경력을 쌓았을 거라는 확신을 하게해준 작품이었다. 2년 후 그는 샌프란시스코 만에 정박중인 항공모함, 본옴므리처드호에 탑승해 있던 중, 갑자기 찾아온 대규모 심장발작 중세로 오클랜드 해군병원으로 이송 된 후 사망선고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45살의 너무 젊은 나이었고 두번째 아내인 단역 배우 출신의 #패트리샤오루크 (그녀의 자매는 여배우, #페기스튜어트 )가 두 딸과 아들 한 명이 함께 곁을 지켰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서부극 <버팔로 건, Buffalo Gun, 1961년>은 그가 죽은 지 2년 후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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